장흥 쇠똥구리마을에 다녀왔어요.
- 작성일
- 2004.07.12 04:08
- 등록자
- 정OO
- 조회수
- 1877
*****딸딸이 경운기를 탔어요.
7월 8일, 광주동화읽는어른모임의 엄마와 아이들이 장흥 쇠똥구리마을에 갔어요. 초행길의 장흥은 제법 먼 길이었어요. 하지만 비 온 뒤라서 탐진강의 물줄기는 시원스럽고 풍성하게 흘렀고, 가는 동안 자귀나무의 분홍빛 꽃송이와 산꼭대기를 덮은 구름들이 우리의 마음을 빼앗았지요. 너무 일찍 집에서 나선 탓에 버스와 함께 흔들리며 잠을 청하는 가족도 있고, <쇠똥구리 구리>(유애로 글, 그림/보림)책을 꺼내 읽어주는 엄마도 있었어요. 멀미기가 있어서 노랗게 질린 얼굴들도 있었고, 줄기차게 "감자에 싹이 나서"를 외치는 아이들도 있었죠.
아침 8시 반에 광주에서 탄 차는 10시에 도착했고, 곧바로 교회차로 갈아타고 15분 정도 들어가니, 마을의 어르신들이 경운기를 세워두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어요. 아이들은 경운기를 보자 환호성을 질렀어요. 딸딸거리는 경운기를 처음 타보는 거라서 모두 입을 다물 줄 모르고 흥분했지요. 경운기 다섯 대에 사이좋게 나누어 타고 우리의 목적지, 쇠똥구리마을을 향해 출발했어요. 바람에 머리칼을 날리며, 큰숨을 들이키고 하늘을 쳐다보는 이 즐거움,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습니다.
*****느티나무 그늘 아래서
길 양편에 가지런히 심어둔 해바라기는 아직 꽃을 피우진 않고 키를 높이고 있었고, 운주(구름기둥)마을의 이름에 어울리게 하늘 가득 흩어지는 구름들이 마을의 산을 둘러싸고 기둥을 이루고 있었어요. 무엇보다 마을을 끼고 두 팔을 벌린 것처럼 늘어져있는 느티나무가 한눈에 들어왔어요. 꼭 <너도 하늘말나리야>의 느티나무를 닮았답니다. 그 느티나무에 기대어 있을 미르를 만날 것만 같은 예감이 들 정도로.
마을회관에 내렸을 때는 동네 아저씨, 아줌마,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모두 나와 반겨주셨어요. 어서오라고 덥석 손을 내미는데 나도 모르게 덥석 그 손을 잡고 쓸어보았지요. 언제 봤다고 이렇게 따뜻할까? 엄마 아부지 계신 고향같은 포근함, 아이들을 보며 연신 벙긋벙긋 웃으시는 모습이 착해보였습니다.
아름드리 느티나무는 수령이 450년은 되었다고 하는데, 멀리서 볼 때는 이렇게 큰 줄 몰랐어요.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나와서 둘러앉아도 좁거나 답답하지 않고 넉넉했어요. 가지가 휘영청 휘어진 모습이 무슨 보호막으로 우리를 감싸 안는 것 같았죠.
*****자연을 닮은 빛깔들
옹기종기 느티나무 그늘에 앉아 '무색'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염색체험을 했어요. 그저 이쁜 색으로 물들일 줄만 알았는데, 색깔마다 담긴 의미에 대해 설명을 듣고보니 자연과 우리가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 조용히 돌아보는 마음이 되었습니다.
흰색은 햇빛이 쨍하고 밝은 날 입으면 좋고, 검정색은 빛을 흡수하기 때문에 몸을 보호하는 성질이 있으니 몸이 약한 사람들이 입으면 좋고, 빨강은 사람을 들뜨게 하고, 푸른색은 하늘과 땅의 기운이 조화되는 색이라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고, 황토는 풀어지는 색이라 외출복으로는 적당하지 않고, 침구나 속옷으로 이용하는 게 좋다고 하셨어요.
먹물과 황토, 소목과 오배자로 염색을 해 보았는데, 소목의 주홍빛 물이 정말 이뻤어요. 그 물에 주물거리다가 석회물에 담갔을 때 번지는 진달래빛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우와, 신비로웠지요. 손수건 한 장 곱게 물들여서 그리운 님에게 편지랑 주고 싶은 마음이 절로 생겨나던걸요.
느티나무 옆으로 흐르는 시냇물에 염색한 옷들을 빠는 것도 재미있었어요.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시냇물의 부드러운 감촉, 돌돌돌 모여 흐르는 맑은 시냇물소리, 빨래하는 아이들의 까르륵 웃음소리, 엄마와 아이가 함께 옷을 비틀어 물기를 짜내며 짓는 미소, 빨랫줄에 하늘거리는 진달래빛, 황토빛, 쪽빛의 옷들, 상상해보세요. 자연에선 모두가 욕심없고 행복하고 아름다워 보여요.
*****여럿이 함께 먹는 밥
우리가 염색을 하는 동안 한쪽에선 멧돌로 콩을 갈아 콩물국수를 준비하고 있었어요. 백 년도 넘게 사용했다는 멧돌을 돌리면서 아이들은 우리 조상들의 지혜로움에 다시 한 번 놀랐지요. 어쩜 이렇게 돌을 맞대어 콩을 갈 생각을 했을까요? 돌을 어떻게 이렇게 둥글고 어여쁘게 갈았을까요? 여섯 살인 호담이는 꽤 무거운 멧돌을 열심히 갈다가 할머니들이 콩물을 떠 주시면 넙죽 받아먹고, 또 힘내서 멧돌을 갈았어요. 그 모습이 귀여워서 할머니들이 번갈아가며 숟가락을 내미니까 많이 먹었다고 손사래를 쳤지요.
우리들 먹이시겠다고 준비한 돼지고기에 나물에 된장국에 콩물국수에 매실효소에 마음 따숩고 배부르게 잘 먹고 행복했습니다. 어르신들이 부지런히 돌아다니시면서 더 먹으라고 챙겨주셨어요. 마을 잔치를 하는 기분이었죠. 아이들도 이렇게 먹는 밥이 얼마나 맛난지 잘 알아요. 평소에 까탈부리던 버릇 다 사라지고 바닥이 보이게 싹싹 비벼서 먹었어요. 뭐니뭐니 해도 여럿이 함께 먹는 밥이 최고로 맛있는 법이거든요.
*****잃어버린 옛날이 살아있는 곳
배도 부르고 오늘 우리가 둘러보고 체험해볼 것들이 정말 많았어요. 시간을 아껴서 열심히 해보기로 마음 먹었지요. 우리는 약초를 재배하는 밭으로 갔어요. 어성초를 아이들에게 한 잎 따서 맛보라고 하자 멋모르고 씹었다가 아뿔싸, 입 안 가득 배어버린 생선비린내. 한바탕 웃고나서 잘 가꾸어진 야생화밭들을 둘러봤어요. 산옥잠, 부처꽃, 더덕, 박하, 벌개미취, 도라지, 초롱꽃, 삼백초 따위의 이름도 이쁘고, 쓰임새도 많은 우리꽃들을 만났어요. 우리 토종꽃들은 언제봐도 정겹고 사랑스러워요. 마을 전체가 우리 것을 소중히 여기고 아끼며 가꾸어간다는 걸 알겠더라구요. 그래서 더욱 마을 어르신들이 존경스러웠어요.
밭을 지나니 맞은 편 느티나무에 다다랐어요. 굵은 밧줄로 느티나무 가지에 그네를 만들어 놓으셨어요. 청일점으로 동행한 재범이 아빠가 아이들을 하나씩 태워주었어요. 시원한 그늘 아래 그네를 띄우는 여유, 문득 이 마을을 꿈 속에 거닐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어요. 여기는 우리의 잃어버린 옛날이 그대로 살아있는 곳이었으니까요.
*****쇠똥구리 애벌레야 안녕
다시 한 번 경운기를 타고 산 가까이 갔어요. 오늘의 주인공 '쇠똥구리'를 만나기 위해서요. 아마도 평생에 타 볼 경운기를 오늘 다 타 봤을 거예요. 경운기가 산을 굽이굽이 돌아갈 때
논 한 가운데서 쉬고 있다가 날아가는 왜가리는 한 장의 엽서 같았구요. 산길의 작은 둔덕에 핀 패랭이는 유난히 아름다웠어요. 작은 개울은 맨발로 뛰어가 첨벙거리고 싶게 깨끗하고 시원하게 흐르고, 어느새 하늘의 구름도 걷혀 쨍쨍한 햇빛이 아이들을 까맣게 태우고 있었어요.
저는 처음 봤어요. 소들을 이렇게 산에 풀어놓고 방목하는 모습을. 눈망울이 촉촉하고 순한 소들이 처음에 우릴 보고 놀라서 산 위쪽으로 몰려갔어요. 아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소들을 뒤쫓아 달려갔지요. 푸른 하늘 아래 송아지들과 어미소들이 아이들과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모습은 바라만 보아도 흐뭇했지요. 우리도 여기서 아이들 방목하게요~ 하면서 엄마들도 아이들을 마냥 내버려 두었어요. 그랬더니 시냇가에 가서 첨벙 온몸을 적시고 나오고, 잠자리와 청개구리를 잡으러 뛰어다니고, 소똥을 헤치고 쇠똥구리의 흔적을 뒤지면서 서로 말없이 확인하는 게 있었어요. 자유로움이 주는 편안함, 눈빛으로 읽어내는 마음의 교감들,
엄마와 아이의 관계를 넘어서는 하나됨, 우리 모두가 지켜가고 싶은 고향의 모습...
비록 책에서 보았던, 소똥을 굴리는 쇠똥구리를 보진 못했지만 소똥 속에서 꿈틀거리는 애벌레들을 보고, 어딘가 어미 쇠똥구리가 열심히 살아가고 있을 거라는 믿음과 희망을 품고 내려왔어요. 우리한테 보여주고 싶어서 소똥과 땅속을 헤집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 때문에 놀랐을 애벌레를 생각하니 그만 헤집고 싶어지더라구요. 우리는 충분히 만족스러웠고 기도했습니다. 애벌레들아 건강하게 잘 자라다오.
*****감사하는 맘으로
맑은 계곡에 세수를 하고 거듭 이 마을 분들께 감사했어요. 맑은 개울과 물 속을 기어다니는 다슬기들과 논물에서 헤엄치는 오리들을 보게 해 주셔서 말이예요. 항생제가득한 사료를 쓰지 않고 풀과 짚을 먹이고, 소들을 좁은 우리 안에 가두지 않고 자유롭게 뛰놀게 하고, 농약을 쓰지 않고 유기농으로 먹을거리들을 생산하는 이분들의 수고가 있기에 우리가 미래를 꿈꿀 수 있다는 사실 앞에 더욱 머리 숙여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더 놀고 싶어서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아이들을 불러모아 이번엔 야생화 화분을 만들러 갔어요. 흙을 주무르면서 노는 건 애들이나 어른이나 한가지로 즐거웠어요. 개성대로 참 여러가지 모양의 화분들이 뚝딱 만들어졌어요. 잘 구워서 보내주신다니 기다리는 기쁨을 선물로 받아 돌아오게 된 셈이예요.
처음 밥먹었던 느티나무에 돌아오니 수박을 한 쟁반 썰어서 나누어주시면서 또 오라고, 저 산 너머에 더 좋은 곳도 많다고, 애들 데리고 꼭 오라고 하십니다. 이장님은 우리를 배웅하시면서 장수풍뎅이 암수 한 쌍을 선물로 주셨어요. 야생녹차와 패랭이 모종도 한 박스씩 실어주셨고요. 다녀가는 것만도 벅차고 큰 선물인데, 바리바리 싸서 챙겨주는 인심은 우리네 엄마들 마음인가 봅니다.
*****우리의 마음이 그리움으로 물결치는 곳
마을을 떠나올 때 끝까지 손흔들어 주시던 쇠똥구리마을 어르신들, 아름드리 느티나무, 구름이 걸렸던 산꼭대기를 마음에 꾹꾹 담고서 광주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지요. 마음이 뿌듯하고 흐뭇해서 한잠 푹 자고 나니 버스는 장흥을 벗어나 광주에 닿았습니다. 손에 들려있던 염색한 옷이며, 야생화 화분이며, 장수풍뎅이가 없었다면 볼을 살짝 꼬집어 보았을 겁니다. 마치 판타지 속의 모험을 하고 돌아온 기분이었으니까요.
장흥 쇠똥구리 마을, 자연 그대로의 원형이 살아있는 곳, 우리네 마을공동체의 전통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 쇠똥구리가 열심히 애벌레를 키우고 꿈벅꿈벅한 큰 눈망울의 송아지들이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곳, 우리의 마음이 그리움으로 물결치는 곳, 고향을 아름답게 지켜가는 어르신들, 그대로 눈부신 풍경입니다.
부디 쇠똥구리 마을의 아름다움이 훼손되지 않고 우리 아이들의 고향으로 잘 지켜져가기를 빌어봅니다. 우리가 잠시 쉬었다 온 시간은 짧지만 마음 속에 담아온 기쁨과 고마움은 오래오래 잊지 않을 겁니다. 고맙습니다.